팥소를 대하는 자세
요리를 싫어하는, 정확히는 요리하는 과정이 귀찮은 나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더 관심이 없다. 누군가가 만들어 높은 완제품이 나 같은 귀차니스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그런데 이 영화 <앙 :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는 팥이 단팥소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주인공이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준다.‘앙’은 팥소를 말하는 일본어다.
센타로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동네에서 작은 도라야키(どら焼き)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단골인 여중생들은 연신 수다를 떨지만 센타로는 계속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어느 날 도쿠에라는 할머니가 가게로 찾아와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하지만 76세의 고령에다가 손도 불편해 보여서 센타로는 정중히 거절한다. 할머니는 다시 찾아와서 자신이 직접 만든 단팥을 주면서 먹어보라고 한 후 돌아간다.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다가 맛을 본 센타로는 대량으로 슈퍼에서 파는 단팥과는 차원이 다른 할머니의 단팥을 맛보며 놀라게 되고, 다음 날 다시 찾아온 도쿠에 할머니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받아들인다.
도쿠에 할머니는 센타로에게 팥소를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설명하면서 “팥에는 진심을 담아야 해”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이 과정을 가만히 조용히 버티며 팥이 잘 끓기를 기다리면서 단팥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마치 단팥과 대화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2시간여에 걸쳐서 만든 팥소는 확실히 공장생산용 팥소와는 맛이 다르다.. 이전에는 드문드문 손님이 있는 정도였으나 도쿠에 할머니가 만든 팥소로 도라야키를 만든 후부터는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가 되었다.
서서히 굴레를 벗어나는 센타로
생계를 유지하고 빚을 갚기 위한 목적으로 좋아하지도 않는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는 센타로의 얼굴은 늘 무표정하고 생기가 없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도쿠에 할머니는 불편해 보이는 몸이지만 주변의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할머니는 가게 주변에 핀 벚꽃을 보고 아름다워할 줄 알고 대화도 한다. 달과도 이야기한다.
그러한 할머니 덕에 도라야키는 며칠 동안 잘 팔렸으나 가게 주인이 나타나서 할머니가 나병 환자기 때문에 팥소를 만들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내보내라고 한다. 센타로는 할머니를 내보내지 않지만 소문이 퍼졌는지 어느 날부터 손님의 발길이 뜸해진다. 할머니도 더 이상 가게에 나오지 않게 된다.
센타로는 다시 예전 모습처럼 침울해 진다. 어느 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우편배달부로부터 받은 편지 한 통, 도쿠에 할머니가 보낸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가게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것과 “우리 사장님 잊지 마!!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오랜 세월 동안 감동이나 주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센타로는 할머니의 편지로부터 큰 감명을 받는다.
용기를 얻은 센타로
단골손님이자 센타로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학생 소녀 와카나는 센타로에게 할머니를 만나러 가자고 제안한다. 할머니가 계신 곳에 숲 속 외진 곳에 있는 한센병 환자들끼리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할머니는 예전과 다르게 병색이 짙어 보인다.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한 할머니는 그와 친구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면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한센병 환자들은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편견을 걷어내 주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손이나 기타 신체는 불편하지만 매우 섬세한 재능과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게로 돌아온 센타로는 가게 주인으로부터 통보를 받게 된다. 자신의 조카에게 가게를 열어줄 거라면서 센타로가 가게를 그만둘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망연자실한 센타로는 술독에 빠져 살다가 와카나와 함께 다시 도쿠에 할머니를 만나러 갔지만 할머니는 3일 전에 음성 테이프만 남겨 둔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부디 자신만의 노하우로 단팥방을 만들어 명인이 돼라.’는.’ 할머니의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은 센타로는 할머니가 그렇게 좋아하던 벚꽃 나무 아래에 도라야키 노점상을 열고 밝은 표정으로 “도라야키 사세요”를 외친다.
도쿠에 할머니의 음식과 삶을 대하는 자세는 매우 경건하고 아름답다. 흔히 볼 수 있는 팥, 벚꽃나무, 꽃, 기타 주변 모습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기 마련인데 할머니는 이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울러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살아갈 의미가 있음을 큰 울림으로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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